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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편집후기] 장하리 - 자유와 진실을 위한 외침

 

    나는 여성이다. 

    여성만 있는 공간에 주로 생활한 나로서는 여성차별의 경험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직장생활 처음 시작했을 때, 여성인 내게 멘토 교수님은 "너가 두배로 일해야 남성과 비슷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3배로 일했다. 성과도 3배로 냈다.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굳이 어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알아주는 사람들과만 노는 스타일이다. 

 

    '여성주의'의 세례를 왜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존재론적으로 여성'은 생물학적, 사회적인 여성을 고민하게 

    했으며 '여성연대', '여성독립', '여성주체성' 등에 대한 고민을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손해본 적도

    많았고, 그렇지만 그건 내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이른바 성공한 여성들, 판사나 기업인들이 굳이 '여성성'을 앞세우진 않지만, 나는 나와 터한 공기층이 다른

    먼 저 위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여성으로서의 외로움, 여성으로서의 차별, 여성으로서의 고독과 치열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생물학적, 사회적인 여성이라는 탯줄과 같은 묘한 선험적 교감이자 영적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인 '추미애'에 대한 그런 양가적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여성주의와의 연대가 있다면, 얼마나 더 멋진 여성일까.

   그런 생각도 아득하게 아련하게 하고 있었다.

 

   두둥.. 예전에 정치인 '추미애' 유튜브에서 텔레그렘에서 일어나는 여성착취 문제를 함께 만든 적 있었다. 그때는 그냥 

   멋진 여성정치인이라는 생각 정도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책 작업을 하면서는 밤도 함께 새는 편집회의를 통해서, 저자의 내공은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통찰과 본질을 보는 직관은 저자 특유의 고민, 성찰과 혜안으로 만들어진 사회를 분석하는 힘에서 나왔다. 

   저자의 출판기념회를 다니면서 '선동적이고 레디컬한 그녀의 발언들'에 대해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통쾌하고 통렬한 그녀의 발언을 맥락을 통해 진짜로 이해하고, 그리고 그녀만의 단단함과 철저함은

    그녀를 가까이서, 혹은 그녀를 '자세히 보아야만' 볼 수 있다. 

 

    그녀를 그냥 흘려보기 하거나, 그녀를 그냥 훑어보기 하는 대중이라면 알 수 없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장하리(추미애)는 시대를 두 세 박자를 앞서간다. 그래서 한 두 박자만 놓치면 그녀의 발언을 따라가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조중동이 그러하고, 대중정치가 그러하다. 

 

    나도 조중동 기사를 보고, 윤을 추가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일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결과'가 있다.

 

    그러나, 추가 윤을 키웠다는 기성 보수매체의 프레임을 그대로 민주당이나 진보, 심지어 나까지도 그랬으니까,,

    그냥 기성 보수매체의 의도에 정확히 붙잡힌 것이다.  

 

    저자가 오늘 페이스북에 쓴 것을 보고, 편집후기라는 틀을 빌어서 이렇게 몇자 적는다. 

 

    그냥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면 나는 그냥 혼자 몰래 울다가 무시하고 그들과 상대를 안하거나 무서워서 피해버린다.

    (트라우마로 남아서) 한국사회의 보통의 약자, 아니면 보통의 여성들이 취하는 행동방식이다. 

    그게 더 정신 건강에 좋을 때가 많다는 경험에 의한 학습으로 만들어진 행동패턴이다. 그게 싸우는 것 보다 더 단순하고 

    편하다. 싸움은 분노와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계속 싸운다. 그리고 계속 말한다. 지겹도록. 전투적으로. 

 

    오늘 내가 [장하리] 편집후기를 쓰게 된 이유다. 저자를 통해, 그냥 회피하거나 울거나 무서워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진실이 바로 잡힐 때까지 싸우는 거라고 배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아니다.  보통은 귀찮아서 내가 그냥 숨어버리거나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다. 바로잡힐 때까지 계속 타협하지 않고 거의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사회적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한다. 

 

    추미애 저자가 '영웅'인 이유다. 대중은 지치거나 대중은 잊어버린다. 각성하는 대중을 위해 계속 이야기한다. 

 

    숨지 말고, 진실을 말하고 외치라고. 저자와 함께 일을 하면서 저자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많이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덕짓기'였다. 저자가 공덕을 많이 지었고, 그 공덕을 받은 사람들이 그녀를 든든히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녀의 진실을 향한 용기의 우산이 되어준 것을. 

 

   선거는 모르겠다. 당내 갈등구조와 당내 정파적 이익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안다.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 있다. 

 

   부디, 그녀의 진심과 용기가 대중이 더 크게 호응하길 바란다. 대중의 사회적 모습과 사회적 언어의 호응 양태는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을 못하겠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를 빨리 알아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이제야 그녀의

   진짜 모습을 이해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책을 함께 편집하면서 사회적인 그녀의 모습이 아닌, 진짜 그녀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윤은 추가 키운 게 아니다. 윤은 조중동이 키웠고, 윤은 추를 밟고, 또 윤은 조중동을 잘 활용했다. 

  다만, 윤을 추가 키웠다고 핑계를 대며, 자성하거나 자책하기 싫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윤을 키운)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조중동의 해석에 묻어가려고 하는 것 뿐이다. 

 

  [장하리]는 꼭 잘 해내리라. 2024년 장하리를 응원하는 이유이고, 장하리를 읽어야하는 이유이다.